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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Apple Mac

장 루이 가세에 대하여 - appleforum

by soosun 2008. 8. 18.
쟝 루이 가세는 50년대에 프랑스 오르세에 있는 기술 대학을 졸업하였고, 파리의 휴렛팩커드에서 컴퓨터 관련 직장을 시작하였다. 애플이 막 주식 시장에 상장될무렵, 애플의 첫 번째 해외 지사인 애플 프랑스를 설립하기 위해 가세가 영입되었고, 가세는 애플 프랑스를 애플 내에서 제일 이윤을 많이 내는 자회사로 빠르게 만들어냈다.

1986년에는 애플에서 큰 변동이 일어난 해였다. 스티브 잡스와 1978년부터 모든 애플 광고를 맡아왔던 PR 회사, Chiatt Day가 축출되었던 것이다. 존 스컬리(John Sculley)는 개인적으로 가세를 끌어들여서 애플 마케팅부를 이끌게 하였다. 가세가 애플에 들어온 지 이 주일 후, 맥 플러스가 출시된다. 가세는 맥 플러스 디자인에 별 관계가 없었으나, 맥 플러스는 잡스가 1984년 선보였던 정보기기 개념보다 가세의 비전에 거의 접근한 컴퓨터였다. 그는 맥을 사용자 세계의 중심이자, 다른 디바이스와 서로 연관되는 수단, 정보의 집합체로 보았다.

그 해 후반, 스컬리는 가세를 제품 개발부에도 영입하게 되고, 그는 자신의 매킨토시 비전을 실현시키기 시작한다. 가세는 애플이 폐쇄형 디자인으로는 생존할 수 없으리라 우려하여, 매킨토시 클론 허용을 제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대신 그는 매킨토시 자체가 개방형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새로운' 맥이 나오기 이전, 맥에서의 확장성이란 시리얼포트나 SCSI로만 가능했었다. 모험적인 회사들이 실질적으로 맥의 ROM칩을 새로운 칩으로 교체시키는 등 주변기기를 만들기는 하였지만, 가세의 비전에 들어맞는 예는 아니었다. 그는 확장슬롯이 모든 전문용 맥에 있어야 한다 주장하였다. 우월한 플랫폼에 우월한 소프트웨어, 그는 애플이 앞으로도 이 우월성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68020 맥(매킨토시 II)을 위해, 그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로부터 누버스(NuBus)를 라이센스하였다. 업계 버스 표준으로서, 이제 써드 파티 개발자들은 맥용 제품 개발에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누버스는 당시 기술적으로 PC에서 쓰이는 ISA 버스에 비해 우월하였다. 누버스는 플러그앤플레이를 허용하였으며, 개발자들은 각 카드별로 자원을 수동-파티셔닝할 필요가 없었으며, 운영체제가 모두 처리해주었다. 비록 애플과 넥스트(NeXT)만의 표준이었지만, 누버스는 90년대 중반까지 맥에 주요 확장 수단을 제공하였다.

매킨토시 II는 그래픽 아티스트들에게 특히 대 히트작이었다. 맥 플러스의 한계가 더이상 없었으며, 컬러 디스플레이도 이제는 한 옵션이었기 때문에 그 외 모든 것을 개발자들이 시도해볼 수 있었다. 누버스 표준에 대해 개발을 시작한 활발한 커뮤니티도 생겨났다. 애플 또한 그러했다. 맥용 고급 그래픽을 제공하는 회사인 Radius가 이때 애플로부터 분사된다. 중간급 맥인 SE도 확장 슬롯을 포함하게 되는데, 맥 II 판매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 가세와 그의 팀은 SE에 독점적인 인터페이스, PDS 슬롯을 장착한다.

가세는 맥의 이미지를 계속 형성시켜 나아갔다. 그는 Blue와 Pink 프로젝트의 창립자이기도 하였다. 1989년, 그는 존 스컬리에게 맥이 사용의 편리성에 있어 우위를 지킬 수 있을테지만, OS/2라는 거인이 애플의 하이엔드 시장을 잠식할 것 같다고 보고하였고, 스컬리도 이에 동의하였다. 이에 애플 엔지니어링부는 전통적인 맥 오에스의 차세대 버전(당 기능들이 적힌 카드에 따라 블루라고 불리었다)에 원하는 모든 기능을 결정하게 된다. 엔지니어리부가 원하는 모든 기능들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애플은 맥 오에스를 브랜드화시켰고, 핑크 또한 야심찬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차세대 맥 오에스 최대의 기능 두 가지는 선점형 멀티태스킹과 하드웨어의 신비화였다. 애플은 RISC 아키텍쳐로의 이주와 함께 CISC 68K 프로세서로부터 떠나기를 원하였다. 하지만 둘 모두에서 돌아가는 운영체제를 필요로했다. 불행히도 OS/2(그리고 나중에는 윈도우즈 NT)에 대한 애플의 답변(차세대 애플 RISC 프로젝트인 재규어에서 돌아갈 운영체제)은 몇 년이 지나도록 나오지 못하였다.

블루는 시스템 7로 통합되었고, 시스템 7은 가상 메모리와 32비트 메모리 어드레싱, 통합된 멀티태스킹과 새로운 시스템 폴더 레이아웃을 포함하였다. 예전 버전의 맥 오에스는 새 매킨토시 하드웨어로부터 장점을 완전히 활용하지 못하였다. 예전 버전의 맥 오에스는 8MB의 RAM 이상을 어드레싱하지 못하였다. 새 맥 오에스는 32비트 메모리 어드레싱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기가 바이트급 RAM도 사용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미니 컴퓨터 운영체제에서만 발견할 수 있었던 기능인 가상 메모리도 새 맥에 탑재된 하드 드라이브 공간(이전 맥 128K에는 400KB의 플로피 드라이브만 있었다) 활용을 위해 덧붙여졌다.

그런데 시스템 7이 나오던 해, 윈도우즈 3.0이 나오고, 가세는 윈도우즈에 대해 우려하였다. 윈도우즈는 곧 윈도우즈 95가 나오기 전에 베스트 셀러 소프트웨어 패키지가 되었다. 윈도우즈와 OS/2에 대한 맥의 우월성이라는 가세의 비전이 손상된 것이다. 비록 윈도우즈 3.0이 맥 오에스의 편리함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이전보다 많이 근접한 것 또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드웨어 제조업체들은 새 컴퓨터에 윈도우즈를 번들하기 시작했고, 애플은 점차 틈새 시장으로 밀려나는 듯 해 보였다.

그 해 말(애플의 주가는 20% 떨어진다), 스컬리와 가세는 모두 축출된다. 그때의 컴퓨터 방식에 만족하지 못했던 가세는 멀티미디어 운영체제를 만들기 위해 새 회사를 고려하였다. 그는 "긱들을 위한 운영체제"를 만들기 원하였다. 비효율적인 운영체제가 애플 하드웨어의 완전한 멀티미디어 기능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멀티미디어 유통과 저작에 특화된 완전히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고 싶어하였다.

처음에는 코모도어의 아미가(AMIGA)가 물망에 올랐다. 80년대 후반 상당한 찬사와 함께 출하한 아미가는 스스로를 멀티미디어 플랫폼으로 규정지었었다. 그러나 맥과 같은 68K 프로세서를 탑재했으면서도 완전한 멀티태스킹 운영체제를 갖고 있던 아미가는 미국 시장에서 실패하였다. 브랜드에 민감한 소비자들이 코모도어라는 소기업에서 나오는 컴퓨터 구입에 주저했기 때문이다. 코모도어는 당시 가정용 게임 머신인 코모도어 64로나 알려져 있던 회사였다.

가세는 1988년, 코모도어로부터 아미가 인수를 고려하였지만, 코모도어가 제시한 가격때문에 인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가세가 애플을 떠난 직후, 코모도어 사장이 그에게 접근하여 코모도어의 연구개발부를 이끌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는데, 가세는 이전 애플에서의 일을 다시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허덕이는 기업을 되살릴 수 있을지 알아보고 싶어하였다. 20 개월동안 그는 회사를 맡기 원하였는데, 성공을 하면 지위를 유지할테고, 성공 못한다면 아무 것도 보상을 받지 않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코모도어는 이를 거부하였고, 가세는 다시 회사를 찾아보았다.

여러 운영체제를 알아본 끝에, 가세는 자신의 구미와 값에 딱 들어맞는 곳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애플의 뉴튼 프로젝트 리더였던 스티브 사코만(Steve Sakoman)을 불러들여서 전자 제품 소매상인 Fry로부터 부품을 얻어다가 프로토타입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사코만은 AT&T Hobbit 프로세서에 기반을 둔 마더보드를 제작하였다. 이 프로세서는 뉴튼이 사용할 예정으로 있던 프로세서였다. 더해서 이 컴퓨터는 두 개의 디지탈 시그널 프로세서(DSP)를 포함할 것이었다. DSP의 기능은 FPU의 기능과 유사하다. DSP는 비디오와 사운드 프로세싱에 필요로하는 복잡한 수학 연산 속도를 늘린다. FPU와 마찬가지의 연산이다.

스티브 사코만이 마더보드를 조립한 후, 가세는 회사를 하나 세워서 새로운 운영체제와 하드웨어 판매를 결정한다. 사코만은 이 회사가 Be가 되어야 한다 주장했고,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졌다. 애플과의 예전 계약을 이용하여 가세는 예전의 재규어 엔지니어 세 사람을 불러들여서 새 머신(BeBox)용 운영체제 개발을 돕도록 한다. 이 운영체제의 이름은 BeOS였다.

BeOS는 시작부터 혁신적이었다. 마이크로커널 디자인(넥스트스텝의 후반 버전과 비슷하다)에 멀티미디어 제작을 쉽게 해 주는 개별 서버를 갖추었다. 모노리딕 커널에 드라이버와 유틸리티를 집어 넣는 대신, 각 기능이 각자의 서버를 통해 해결하도록 되어 있는데, 개별 서버가 충돌을 일으킬 경우에는 전체 시스템을 재시동하지 않더라도 쉽게 재시작할 수 있다. Be의 마이크로커널 디자인은 애플리케이션간 정보의 교환도 매우 쉽게 만들었으며, 추가적인 서버가 없다 하더라도 부팅 가능한 운영 체제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당시 애플은 뉴튼용으로서 Hobbit 프로세서(CISC)를 포기하고, 애플이 큰 지분을 소유한 Advanced RISC Machines으로 이주하였다. 대기업 고객이 없자, AT&T는 이윤이 남지 않는 Hobbit 프로세서 생산을 중단하였고, 이때문에 Be는 프로세서를 잃게 되었다.

Be에 고용된 옛 재규어 팀원들은 RISC 프로세서의 사용을 원하였다. 사실 재규어가 사용할 프로세서는 모토로라 88K였지만 가세는 88K 또한 Hobbit과 같은 운명을 갖게 될지 걱정스러웠다. 88K를 구매할 대기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토로라는 IBM과 함께 애플의 새 컴퓨터 라인에서 사용하게 될 별다른 프로세서를 개발중이었는데, 이 프로세서는 PowerPC라 불리었으며, 대기업 고객들도 충분했다. (1999년 당시 모든 GM 자동차와 시스코 라우터에는 PowerPC가 탑재되어 있었다.) BeOS도 곧 이 새로운 프로세서로 포팅이 되었다.

마이크로커널 디자인 사용에 있어서의 장점은 시스템 자체의 융통성이었다. 포팅에는 새로운 마이크로커널과 다른 서버용으로서 몇 가지 부분의 수정만 하면 되었다. 1994년 Be는 PowerPC 아키텍쳐에서 돌아가는 베타 운영체제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최신예 PowerPC 603 프로세서를 사용하는 PowerPC 웍스테이션 중에 저렴한 웍스테이션이 없었다. 따라서 Be는 또다른 BeBox를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이 BeBox는 66MHz로 돌아가는 PowerPC 603 프로세서 두 개와 DSP 두 개를 탑재하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소비자용 데스크톱 시스템의 클럭 주파수는 40 MHz보다 훨씬 아래였다.) 새로운 BeBox는 넥스트와 썬, 실리콘그래픽스에서 나온 보급형 웍스테이션을 모두 능가했다.

GeekOS라고도 불렸던 새 운영체제는 1995년, 엑스포에 나오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가세는 이 혁신적인 운영체제를 여러 중역들에게 선보이기 주저했다. 그는 BeOS가 저평가받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는 BeOS를 기업 중역들보다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들과 그 외 팬들에게 선보이기 원하였다. 하지만 자금이 점점 부족해지는 가운데에 그에게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Be에 대한 그의 초기 투자 자금은 거의 다 사라졌었고, 운영체제의 완성을 위해서는 벤쳐 자본가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BeOS는 믿을 수 없으리만치 강력했으며, BeOS의 속도와 기능을 보여주는 특별한 데모 프로그램도 꽤 있었다. 어떤 데모는 16 개의 비디오 스트림을 프레임 저하 없이 동시에 돌리기도 하였다. 당시는 대부분의 개인용 컴퓨터들이 특별한 디코더가 없는 상황에서 MPEG 비디오를 재생시킬 수 없던 시절이었다. 또한 강력한 3D 기능을 보여주는 데모도 있었다. 날아다니고 춤을 추는 Be 로고는 거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보였다. 한 번에 다중 instance를 불러들일 수 있었으며, 운영체제는 부하를 각 프로세서에 고르게 분배하였다. 엑스포 참가자들은 모두 새 운영체제에 감동을 받았으며, 가세는 투자자들을 쉽게 모을 수 있었다.

1996년, 애플은 603 프로세서를 탑재한 파워맥 라인을 출하한다. 초기 세 명의 개발자 중에 하나인 브누아 실링스(Benoit Schillings)는 BeOS를 표준 파워맥에서도 돌아가게 포팅시켜서 거대한 매킨토시 시장을 잠식해야 한다 주장하였다. Be는 1996년 애플 WWDC에 참가할 예정이었고, 실링스는 그때까지 맥 상에서 돌아가는 BeOS를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당시 애플은 Be에 대해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Be는 클론 업체인 Power Computing과 계약을 맺어서, PowerCenter 132에 탑재될 수 있었다. 당시 PowerCenter 132는 애플 맥을 포함해서 제일 빠른 맥-호환 컴퓨터였다. 다행히도 파워매킨토시와 비박스는 모두 상당히 닮은 기종이었다. 같은 IBM 마더보드 디자인에서 파생됐기 때문이다. 6 주일 뒤, Be는 많은 기능이 아직은 누락 상태였지만 WWDC에서 PowerCenter에서 돌아가는 BeOS를 준비하였다. BeOS는 플로피 디스크와 출력을 사용할 수 없었고, 인터넷에는 PPP를 통해서 접속하였지만 버그가 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e의 출현은 큰 히트였다. 모든 컴퓨터 잡지들이 Be를 다루었고, 여러 클론 업체들이 BeOS 탑재 계약을 하였다.

WWDC 기간동안 애플은 개발자 버전의 코플랜드를 데모하였었다. 1996년에 나올 예정으로 되어 있었지만, 애플 내부 관측통들은 코플랜드가 과연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애플은 앞으로 나오게 될 소비자용 버전의 윈도우즈 NT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운영체제를 사들이거나 라이센스해야할 형편이었다.

당시 애플 경영진은 다른 운영체제를 라이센스 하는 편이 값이 덜 먹히리라 생각하였다. 처음에 애플은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와 접촉하여 솔라리스를 수정해서 사용할 수 있는지 문의하였다. 하지만 가격이 너무 높았고, 애플은 다른 곳을 알아보았다. AIX와 OS/2, 심지어는 윈도우즈 NT까지 알아보았지만 애플의 탐색은 별 소득이 없었다. 이에 애플은 새 운영체제를 사들여야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언론의 초점은 Be에 맞춰져 있었다. BeOS는 이미 파워매킨토시에 포팅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인터페이스도 맥과 엇비슷했다. 두 회사는 1996년 6월, 인수 협상에 들어간다. 애플 CEO, 아멜리오(Gil Amelio)와 가세는 가격을 두고 협상을 벌였는데, 가세의 최종 제안 액수는 2억 5천만 달러였다. Be의 가치보다 2억 달러가 더 높았었다.

아멜리오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넥스트를 인수하여 오픈스텝을 사용하기로 결정내린다.

가세는 상당히 실망했지만 곧 Be를 다시 전진시킨다. 애플에 Be를 팔 수 없게 되자, Be는 X86 플랫폼으로 관심을 돌린다. 소프트웨어팀은 BeOS를 펜티엄으로 포팅시키는데, 운영체제의 교체가 아닌, 부가적인 운영체제를 제공할 것이었다. 가세는 윈도우즈와 오피스에 대해 경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내렸다. 대신 Be는 BeOS가 부가적인 운영체제라 마케팅하였다. 일상적인 오피스 작업에는 윈도우즈를 사용하면서 멀티미디어에는 BeOS를 사용하게 하는 식이었다. 이 접근은 실패하였다.

Be의 노력은 한 번 더 주목을 받게 되는데, 애플에서 가세가 가졌던 개방형에 대한 비젼과는 완전히 다는, 인터넷 기기때문이었다. BeIA라 불린 이 기기는 PowerPC와 Opera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소니 외에 이 제품용 벤더를 찾을 수가 없었다. 불행히도 인터넷 기기에 대한 열기는 시들어버렸고, 결국 소니도 모든 BeIA 고객들에게 리펀드를 해 줄 수 밖에 없었다.

자본은 빠르게 잠식당해갔고 Be는 문제에 휩싸였다. 가세는 Be를 인수해 줄 회사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Be는 PC 제조업체들의 BeOS 번들을 방해한 혐의로 마이크로소프트를 제소하였다. 수 천만 달러를 들인 끝에 결국 Be가 승리하기는 하였지만 너무 늦었으며, Be는 자산을 애플이 제시했던 값보다 훨씬 헐값으로 Palm에 넘겼다.

가세는 이미 Palm의 이사진이었으며, 새 Palm OS 전략이 BeOS를 중심으로 하도록 조정하였다. BeOS의 컴퍼넌트들이 Palm의 차세대 운영체제인 코발트(나중에 Palm OS 6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에 사용될 예정이었다. 2003년 8월, Palm은 두 개의 회사로 분리되는데, 제조업체는 PalmOne, Palm OS와 BeOS의 개발자들로 이뤄진 PalmSource이다.

가세는 PalmSource의 사장이 된다. 회사 분리 이후 PalmOne은 운영체제 핵심에 BeOS를 쓰지 않겠노라고 발표하였다. 대신 Palm OS를 돌리기 위해 PalmOne은 중국제 리눅스를 이용하였는데, PalmOne의 발표 이래 어느 회사도 Palm OS 6에 기반을 둔 디바이스를 아직까지 발표하지 않고 있다. (발표 계획조차 아직 없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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