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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NeXTSTEP

NeXT 인수와 잡스의 쿠데타

by soosun 2008. 8. 18.



NeXT, OpenStep, and the Triumphant Return of Steve Jobs
Tom Hormby
2005.11.05




1996년 2월, CEO 임명을 받던 날, 길 아멜리오(Gil Amelio)는 병에 걸린 기업을 다스리려 왔다. 거의 재앙에 가까웠던 마이클 스핀들러(Michael Spindler) 후임으로 임명된 아멜리오는 애플 사풍의 변화를 약속하였다.

애플 사내 전체에 보낸 이메일에서, 아멜리오는 “일이 안 좋아지면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일이 좋아지면 여러분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겠습니다.”라 적었다. 애플 엔지니어들 탓으로 돌리기 바뻤던 이전 CEO들과는 분명 다른 인상이었다.

아멜리오는 예산 비용도 대규모로 줄이고 결국 수 년만에 처음으로 흑자를 안겨다 주는데에 성공하였다. 그렇지만 이미 줄어들고 있던 애플의 시장 점유율은 더욱 더 줄어들게 되었다. 1996년 회계년도동안 컴퓨터 시장 자체가 18% 이상 늘어났는데도, 애플의 시장 점유율은 15% 줄어들었다.

아멜리오와 경영진들은 장보러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윈텔 공룡과 경쟁하기 위한 운영체제가 필요했다. 예전에도 몇 번인가 그런 일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회사가 위기에 처해 있었다.

Limited Options

가능한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가 있었다.
  1. 윈도우즈 NT를 라이센스하여, 거기에 맥과 비슷한 인터페이스를 입힌다.
  2. 썬 솔라리스를 라이센스하여, 거기에 맥과 비슷한 인터페이스를 입힌다.
  3. 코플랜드 프로젝트에 집중하여, 일 년 반 안에 출시한다.
  4. Be를 인수하여 BeOS를 사용한다.
  5. 넥스트를 인수하여 오픈스텝을 사용한다.
애플의 CTO인 엘렌 한콕(Ellen Hancock)의 조언에 따라, 아멜리오는 라이센스 선택을 모두 취소시켰다. 그렇게 할 경우 소프트웨어에 대한 통제력을 제한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코플랜드에 대해서는 이미 약속이 많이 만들어졌다가 많이도 깨진 상태였다. 결국은 Be와 NeXT밖에 없었다.

한콕은 엔지니어 팀과 경영진들을 이끌고 비오에스와 넥스트를 알아보러 나갔다.

BeOS, the Obvious Choice

분명한 선택은 비였다. 전임 애플 COO, 쟝 루이 가세(Jean Louis Gassée)와 뉴튼 프로젝트의 창시자, 스티브 사코만(Steve Sakoman)이 만든 비는 열 살이 되어 있었고, 마이크로커널 기반의 운영체제 비오에스를 만들어냈다.

비는 이미 맥용 운영체제를 만들어 놓고 있었고, 비오에스는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속도에 있어서 이미 많은 맥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었다. 비오에스는 아직 베타 형태였지만 굉장했다. 가세 자신의 추측에 따르면, 비오에스를 대중 시장용으로 완성시키는 데에는 몇 년 안 걸릴 것이었다.

그러나 협상은 빠르게 종결되었다. 비의 가치가 그 십 분의 일 정도였지만, 가세는 3억 달러를 원했다. 검소함의 대명사 아멜리오는 그런 과대평가된 돈을 가지고 미완성 운영체제에 투신할 수 없었다.

The NeXT Step

한콕의 팀은 이제 넥스트에 집중되었다. 사실 넥스트는 심각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미 애플 복귀 의사를 드러낸 바 있었던 스티브 잡스는 넥스트-기반의 맥 오에스에 대한 아이디어를 소개하기 위해 두 명의 마케팅 중역을 애플로 보냈다.

잡스는 1985년에 넥스트를 설립했고, 자기가 가졌던 애플 주식 전부(1억 3500만 달러 어치)를 사용하였다. 잡스는 그유명한 에이비 티베이니언(Avie Tevanian)과 그 외 여러 애플 엔지니어들을 고용하였고, MS-DOS와 맥 오에스가 경쟁하던 시장에 개인용 객체 지향 운영체제 프로젝트 작업을 시작하였다.

애플은 빠르게 개입하였다. 애플 직원들과 지적 재산권의 유용을 고소하겠다는 의사였다. 따라서 넥스트는 애플 제품과 경쟁하지 않겠으며, 넥스트를 웍스테이션 시장으로 한정시키겠다고 합의를 하여 주었다.

컴퓨터 업계 모두가 넥스트스텝을 칭송하였다. 잡스는 “맥보다 더 맥다운(more Mac than the Mac)"이라는 표어를 만들어냈다. 넥스트스텝은 고도로 직관적인 인터페이스와 마이크로커널에 기반하는 진보된 운영체제를 갖고 있었다.

넥스트스텝의 최대 강점은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환경이었다. 이 환경 하에서는 여러 다른 프로그램에서 쓰인 코드 재사용이 매우 쉬웠다. 따라서 복잡하고 기능이 풍부한 프로그램도 제작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원하는 기능 모두를 다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Sunset, Sunrise

비록 업계의 칭송을 받기는 했지만, 넥스트는 썬이 거의 10년 동안 지배하고 있었던 웍스테이션 시장을 뺏어 올 수 없었다. 1994년, 5만 대의 컴퓨터를 판매한 후, 넥스트는 하드웨어 전부를 포기하고 소프트웨어로 집중하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넥스트의 첫 번째 파트너는 웍스테이션 시장 최고의 경쟁상대인 썬이었다. 썬은 솔라리스용 객체지향 프로그래밍 환경을 만들고 싶어했다. 넥스트는 커널에서 넥스트스텝을 벗겨 내고, 솔라리스용으로 재작업하였다. 이 새 제품은 오픈스텝이라 불리었다.

하지만 썬은 이를 취소시키고 대신 자바에 집중했다. 그래도 다른 회사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졌다. 넥스트는 윈도우즈를 포함하여 여러 다른 플랫폼용으로 오픈스텝을 포팅시켰다. 맥 버전도 작업중이라는 루머가 많았다.

넥스트 소프트웨어 전략의 다른 한 부분은 웹오브젝트에 있었다. 본질적으로 네트워크용 오픈스텝이라 할 수 있는, 웹오브젝트는 인터넷 상에서 돌아가는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환경이었고, 매우 잘 팔려나갔다. 웹오브젝트는 델 웹사이트를 담당하여 공장을 자동화시켰고, 연방 정부 내에서도 여러모로 쓰였다.

Apple and NeXT

애플이 넥스트에 끌린 이유는 넥스트가 제품을 완성시켜 놓았고, 애플이 들어서기 원하는 시장에서 꽤 성공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협상은 1996년 12월 2일, 아멜리오와 잡스의 만남으로 시작하였다.

두 남자는 실험적인 계획에 동의하였다. 애플이 4억 3천만 달러에 넥스트를 인수한 다음 넥스트 엔지니어들이 PowerPC용 오픈스텝을 포팅해서 기존의 맥 오에스와도 하방 호환성을 갖도록 한다였다.

합병은 1997년 1월 7일 공식 발표되었다.

합병 선언 이후 최초의 대규모 행사였던 맥월드 샌프란시스코에서 애플의 운영체제 계획도 발표될 예정이었다. 길 아멜리오가 기조연설을 하는 날, 4천 명의 인파가 홀에 모였고, 사람들이 넘쳐서 방문도 모두 개방시켜 놓았었다.

애플은 이 행사를 수 달 전부터 준비해 오고 있었다. 특히나 저조한 매출이 발표된 이후로, 회사에 대한 확신감을 좀 더 개선시키기 위해서였다.

Amelio's Demise

아멜리오도 실패하였다. 조직위원들이 권유했지만, 그는 기조연설 리허설을 거절하였다. 그 결과 그는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채로 연단에 올라섰고, 주제에서 벗어나는 말을 하거나 말이 멈출 때도 있었다. 그는 주어진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넘겨서 연설을 했고, 그때문에 여러가지 연설이 취소가 됐다. 그 중에는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도 있었다.

아멜리오는 두 명의 손님 연설자때문에 빼앗긴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싶어하였다. 그 두 손님 연설자는 다름아닌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다. 스티브 잡스는 넥스트와 애플에 대해 연설하면서 오픈스텝에서 제일 자랑스러운 기능을 간결하고 인상적으로 선보였다. 애플의 다른 창립자이자, 5학년 선생님이 된 스티브 워즈니악도 연설을 가졌다. 둘 다 기립 박수를 받았다.

아멜리오는 써드 파티 개발자와 투자자들의 이목을 끄는 데에도 실패하였다. 애플의 운영체제 전략에서 새로 나온 것은 전혀 없었으며, 바로 다음 날 애플 주가는 거의 40 센트 떨어졌다. 아멜리오는 컴퓨터 업계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자신의 “아멜멜한 연설”때문이었다.

연설 후, 아멜리오는 한콕을 강등시킨다. 평범한 직원들은 한콕을 높이 사고 있었다. 그녀는 연구 개발부로 옮겨갔다. 애플의 경영 일선에 대한 그녀의 영향력을 최소화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기조 연설 몇 주일 전, 그녀는 넥스트의 마흐 커널 대신, 코플란드용으로 개발된 마이크로커널인 nuKernel을 써야 한다면서 스티브 잡스를 공격한 적도 있었다.

CTO 자리는 사라졌고, 잡스 충성자들로 채워진 두 자리가 새로 생겨났다. 애플 소프트웨어를 새로 이끌게 된 수장은 카네기멜론에서 마흐 마이크로커널을 디자인한 애이비 티베이니언이었다. 하드웨어를 맡은 사람은 넥스트에서도 같은 부서를 이끌었던 존 루빈스타인이었다.

이 모두가 애플 최악의 시기에 일어났다. 넥스트 인수와 그 외 기타 조직 재구성때문에 애플은 이 분기에서만 7억 달러가 넘는 적자를 보았다. 일 년 전, 마이클 스핀들러 대신 아멜리오가 들어섰을 때, 아멜리오에 대한 호의는 거의 사라져 있었다.

애플 중역들(아멜리오 자신이 뽑은 사람들이 많았다)은 떠나기 시작했다. 1996년 아멜리오가 CEO가 된 이래 47 명이었던 중역들 중 1997년 3월에는 29 명이 떠나갔다.

1996년 여러 중역들은 아멜리오에게 뉴튼을 중단시키라 말하였다. 이윤을 결코 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좀 더 성공적인 제품들의 이윤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권유(그리고 뉴튼부를 인수하겠다는 여러 제안)를 물리친 아멜리오는 봄에 뉴튼 부를 별도로 만드는 실험적인 시도를 하게 된다.

애플에게는 불행한 시절이었다. 3월 26일 마감장에서 애플 주가는 10년 내 최저가인 16.75 달러를 기록하였다.

Ellison's Plan for Apple

잡스는 드라마같은 쿠데타도 아멜리오로부터 통수권을 빼앗으려 하였다.

그 첫 번째 시도는 잡스의 절친한 친구, 래리 엘리슨으로부터 나왔다. 엘리슨은 1977년, 데이터베이스 개발사인 오라클을 창립하였고, 그덕분에 엄청난 재벌이 되었다. 그는 당시 세계 3위의 부자(마이크로소프트 사람인 빌 게이츠와 폴 알렌 바로 다음이었다)였다. 3월 27일 산호세 머큐리 뉴스에서의 한 인터뷰에서, 그는 여러 외부 투자자들과 합세하여 애플을 인수할 생각이 있노라 말하였다. 그러고서는 자기가 애플을 인수한 다음에 CEO로 잡스를 앉히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이도 시들해졌다. 엘리슨의 제안은 주가에 묶여 있었고, 주가는 저평가되고 있었다. 그 결과 엘리슨의 21억 달러 제안은 애플 잠재 가치에 못미쳤다. 그의 제안이 애플의 실질 가치였다 하더라도, 엘리슨은 애플을 네트워크 컴퓨터의 제조업체로 탈바꿈시키려 하였을 것이다. 네트워크 컴퓨터는 시도된 바 없는 시장이었다.

네트워크 컴퓨터는 엘리슨의 비전이었다. 개인용 컴퓨터가 너무 고가이고 대부분 사용자의 필요보다 고성능이었다. 네트워크 컴퓨터는 대부분 같은 기능을 제공해 주면서 소프트웨어는 원격 서버로 작동하여, 네트워크 컴퓨터는 씬 클라이언트처럼 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이 아이디어에 난색을 표했다. 대부분의 사용자들이 돌리기 원하는 소프트웨어의 네트워크가 충분치 못했기 때문이다.

엘리슨의 제안은 수많은 맥 팬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나머지 우리들”을 위한 컴퓨터가 오라클 서버와 고속 네트워크에 들어가는 컴퓨터로 바뀌게 될 판이었기 때문이다. 엘리슨은 4월 29일, 그 제안을 철회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멜리오의 불안이 가신 것은 아니었다.

Boardroom Politics

애플 이사진은 바뀌고 있었다. 스티브 잡스 자신이 이미 이사가 되어 있었고, 여러 오랜 이사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떠날 것을 종용받고 있었다. 잡스는 70년대 후반 애플 투자 자금을 제공했으며, 초대 CEO를 지냈던 마이크 마큘라(Mike Markkula)에게도 이제 쉬시라 요구하였다.

두 달 후, 이사들 구성이 전체적으로 바뀌었다. 비지니스위크와의 한 인터뷰에서 아멜리오는 이렇게 주장했다. “스티브 친구들로만 채워졌다.”

잡스는 이제 아멜리오를 축출할 권력을 갖게 됐다.

잡스는 이미 애플을 다스릴만한 힘을 갖고 있었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부를 모두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미지때문에 다른 부서도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그유명한 EvangeList를 맡고 있었던 가이 가와사키(Guy Kawasaki)는 이렇게 말했다. “스티브가 이미 실질적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당시 뉴스그룹에 한 애플 직원이 올린 글을 보자. 잡스의 영향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 직원이 올린 글에는 영업사원들용으로 특화된 파워북이 있었다. 이 디바이스에는 고객에게 넘길 수 있는 분리형 화면을 갖고 있었으며, 키보드와 트랙패드로부터 무선으로 컨트롤되었다. 기술적인 결함을 넘어서 그런 시장이 없었다. 그런데 출시 준비가 됐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이 프로젝트에 대해 들은 다음, 아멜리오의 허가 없이 바로 이 프로젝트를 취소시켰다.

Jobs Triumphant

이사들로부터의 중압감 끝에, 아멜리오는 7월 9일, 사표를 제출한다. 그의 재임 기간은 18 개월 뿐이었지만, 그가 애플에 끼친 영향은 거대했다. 그는 비용을 극적으로 줄여서, 그덕분에 애플은 넥스트를 인수할 자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터무니 없이 높은 퇴직금을 요구하였다. 그는 퇴직금으로 700만 달러를 받는다.

아멜리오가 애플 CEO를 시작할 때 고용했던 CFO, 프레드 앤더슨(Fred Anderson)이 임시로 애플 경영일선을 맡았고, 스티브 잡스는 새 CEO를 찾을 위원회장을 맡았다. 몇 명의 후보를 인터뷰 한 끝에, 스티브는 임시 CEO를 뜻하는 (iCEO)라는 타이틀을 받게 된다. 이제 그는 70년대 중반, 창립에 도움을 주었던 애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가 한 첫 번째 일은 이사 회의실 옆에 붙어 있는 매우 작은 사무실로 옮긴 것이었다. (아멜리오는 여전히 CEO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넥스트스테이션을 설치하였다. 맥 오에스 텐이 퍼블릭베타 버전으로 나오기 이전까지, 잡스는 맥을 개인용 머신으로 사용했다.

스티브는 아멜리오가 구사했던 비용절감 조치를 지속시켰다. 3 주일 동안 그는 애플 내 모든 프로젝트를 감사하였다. 프로젝트 리더들을 하나 하나 이사 회의실로 불러서 자신의 프로젝트가 왜 계속되어야 하는지 질문하였다. 이로써 연구개발 프로젝트는 350 개에서 15 개 내로 감축되었다.

그는 마케팅부도 크게 변화시켰다. 당시 마지막으로 벌였던 대규모 마케팅은, 영화 인디펜던스데이와 미션임파서블과 파워북 5300C였다. 이 영화는 모두 대규모 히트를 기록하였지만, 광고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소비자들은 애플의 신뢰성 없는 하드웨어를 멀리하였다.

Think Different

잡스는 즉각적으로 영화와 연계됐던 광고를 중단시키고 Chiat/Day를 고용하여 새로운 슬로컨을 만들도록 시킨다. Chiat/Day에서 애플을 맡고 있던 리 초우(Lee Chow)는 “Think Different"를 제안한다. 이 슬로건은 파워컴퓨팅처럼, 애플이 가진 혁명가적 성격을 주었다.

아멜리오는 엘리슨 인수 루머가 돌던 시기에 몇 가지 네트워크 컴퓨터 프로젝트를 만들었지만, 진전은 거의 없었다. 엘리슨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던 잡스(엘리슨 또한 애플 이사로 임명됐었다)는 인터넷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발족시킨다. 이 인터넷 매킨토시와 파워 매킨토시가 제일 다른 점은 원격 서버로부터 운영체제를 읽을 수 있는 인터넷 매킨토시의 기능이었다.

산업 디자인을 이끄는 조나단 아이브는 세련되고 투명한 올인원 케이스 디자인을 만들어낸다. 아멜리오가 있던 시절 이 디자인의 행방은 불확실했지만, 잡스는 산업 디자인부를 감사할 때, 이를 온 마음으로 채택했다. 그는 인터넷 매킨토시를 선보이기 직전에, 이를 아이맥으로 다시 이름지었다.

아이맥은 1998년 5월에 발표되었고, 8월 15일에 출시하였다. 아이맥은 전 컴퓨터 업계에 걸쳐서 최고로 잘 팔리는 컴퓨터가 되었고, 애플에게 장기 이윤을 안겨다 주는 데에 한 몫 하였으며, 잡스의 지위를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해 후반기, 그는 애플의 정식 CEO가 되었음을 발표하였다.

http://lowendmac.com/orchard/05/1115.html

위민복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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